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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열하일기의 저자인 박지원은 양반전과 허생전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열하일기의 문체에는 재치와 유머가 녹아있고 누구든 쉽게 읽고 이해할 정도로 명료하다. 명문가 출신이었던 박지원은 어렸을 때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한다.. 이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무작정 거리로 나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도사와 건달등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얻은 친화력은 박지원이 여행길에서 만난 많은 청나라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데 큰 도움이 된다. 부귀영화에 별 뜻이 없었던 박지원은 과거를 보는 것을 포기하고 세월을 보내다가 마흔 중반에 청나라사절단에 함께 할 기회를 얻게 된다. 공식적인 직무가 없었던 그는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고 구경하며 6개월간 청나라 여행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기록한 여행기가 열하일기이다.
열하일기내용
청나라는 한족이 세운 명나라를 멸망시킨 만주족에 의해 세워졌는데, 유교를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던 조선인들은 이런 만주족을 ‘되놈’이라고 부르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 청나라는 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조선과는 비교되지 않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1780년6월24일 조선의 사절단과 박지원은 압록강을 넘어 청나라에 들어선다. 박지원은 국경지대에서 의주 장사꾼들과 마주하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청나라 제품을 싸게 사서 조선 상인들에게 비싼 값에 되팔아 큰 이윤을 취하는 무리였다. 박지원은 이 때문에 중국 물건의 값이 나날이 올랐지만 나라에서는 이 원리를 이해하는 자가 없어 의주 상인의 상술에 속수무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절단은 얼마 후 청나라 변방에 해당하는 어느 국경 마을에 들어서게 되는데 반듯하고 정리된 건축물과 도로에 감탄하게 된다. 그 거리 좌우에 널린 휘황찬란한 가게들과 쉴 새 없이 지나치는 수레가 중국이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집들이 벽돌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중국에서는 항상 규격에 맞는 벽돌과 기와를 찍어냈기 때문에 벽돌이 서로 어긋나 틈이 벌어지는 일이 없었고 벽돌과 기와 사이에 석회를 발라 쥐 나 뱀이 들어갈 공간을 주지 않았다. 반면 조선에서는 벽돌을 사용하지 않아 아래에서 받쳐주는 힘이 약했고, 지붕에 석회 대신 진흙을 두툼하게 발라 위가 무거웠다. 때문에 기둥은 휜 데다가 진흙이 마르면서 틈새가 생겼고, 이 틈으로 비가 새고 쥐와 뱀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같은 크기의 벽돌과 기와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겪지 않았다고 박지원은 기록했다. 봉황산에 도착한 박지원은 안시성을 언급하면서 평양의 위치에 대한 흥미로운 말을 남겼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평양외에도 여러 지역에 평양이라 불리우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의 위치에 따라 중국와 우리나라의 경계였다고 알려진 패수가 어떤 강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데 우리는 대동강을 낀 평양만을 평양이라고 정해 스스로 국토를 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지원은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부질없이 중국의 역사 기록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나라 당나라의 지명을 이야기하면서 패셔니 평양이니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사실과 는 너무나 어긋난 상태이니, 이런 상황에서 이성이 안시성인지 봉황성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사절단은 압록강을 건넌지 보름만인 7월 10일 청나라의 옛 수도였던 선양에 도착한다. 박지원은 심양에서 만난 중국상인들과 술집에서 필담을 나누면서 여러 날을 보내게 된다. 박지원이 청나라를 여행하는 내내 중국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던 이유에는 특유의 친화력뿐만 아니라 그의 글 솜씨도 있었다. 명필인데다 문장도 뛰어나 한 번 글을 쓰면 여기저기서 그의 글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청나라 사람들이 사절단에 몰려들었던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조선의 청심환이었다고 한다. 박지원도 환심을 사고 싶었던 인물이나 고마움을 느꼈던 사람들에게는 종종 청심환을 선물했을 만큼 조선의 청심환은 중국에서도 최고의 인기품이었다. 박지원은 중국을 여행하면서 최고의 장관 두 가지를 꼽았는데, 그것은 기와 조각과 똥덩어리였다. 중국에서는 깨진 기와조각도 버리지않고 담을 쌓을 때 무늬를 만들었고, 똥 한 덩어리도 아까워하면서 네모 반듯하게 쌓고 거름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박지원은 하찮은 것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 활용하는 방식만 보더라도 청나라 제도의 효율성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청나라의 풍요로움을 가능하게 했던 근간을 본 것이었다.
소감
조선으로 돌아온 박지원은 자신의 경험담을 열하일기에 담아적 었다.. 하지만 문체가 천박하다는 이유로 금서가 된다. 어떤 이들은 박지원이 고국인 조선을 지나치게 깎아내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자국에 대한 자부심만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필요한 것 같다. 열하일기에 대한 여러 서적을 쓴 고전평론가 고미숙박사는 열하일기를 세계 최고의 여행기로 꼽았는데 열하일기가 그저 그런 여행기록 이상의 특별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